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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를 꿈꾸는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Karl R. Popper)

“20세기 전부를 살았던 철학자”
오래 산다는 것은 철학자에게도 행운이다. 포퍼(Karl R. Popper:1902~1994)는 1902년 오스트리아 빈(Bien)에서 태어나서 1994년 영국 런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20세기 전부를 살다 간 셈이다. 긴 생애 동안 그는 비약적인 과학 발전의 시대이자 탐욕과 독선으로 빚어진 전쟁으로 가득 찬 20세기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철학자의 임무가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시대의 근본 문제를 진단하여 바람직한 대안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포퍼는 이 점에서 대단한 행운아였다. 한 세기 전부를 체험 속에서 진단하고 이 것이 검증되는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20세기 초반에 내린 과학과 사회에 대한 진단은 정확한 것이었고 세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개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20세기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어도 될 고통으로 말이다.

“탈퇴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입한 죄”
포퍼가 태어난 1902년 당시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아버지는 개종한 유태계 법률가로 빈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다. 무척 학구적이어서 그리스 로마 고전을 독일어로 옮기는 것이 취미였고 자선 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 했다고 한다. 포퍼는 ‘부엌을 빼고는 어디든 책이 꽂혀 있는 집안(무려 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 !)’에서 아버지의 장서들을 탐독하며 안락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퍼가 그보다 50년만 전에 태어났어도 그는 유복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갈 팔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세상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물자가 부족해졌고 서로 다른 사상과 민족에 대해 관대했던 제국의 이념은 흐려졌다. 빈곤층이 늘어날수록 사회 부(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태인에 대한 증오는 점점 더 커졌다. 포퍼 집안은 이미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지만 그들을 같은 ‘제국 시민’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유태인이란 사실이 저주 같던 시기, 유태계였던 포퍼는 ‘어떻게 해도 탈퇴 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입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0세가 넘을 때 까지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그의 삶을 줄곧 일그러뜨렸다.

“열린사회를 꿈꾸게 한 혼란과 빈곤”
1918년, 제국이 패전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자 포퍼 집안의 가세(家勢)는 완전히 기울어졌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포퍼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도 보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아버지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군대 막사 같은 학생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다. 빈약한 체구에 체력도 약했지만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타고난 학구열만은 버릴 수 없었다. 빈 대학의 청강생 자격으로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들은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지식인 젊은이들이 보통 그렇듯이 포퍼도 마르크스(K.Marx:1818~1883) 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만연한 고통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으로 본다. 정부는 권력과 돈을 움켜쥔 소수, 즉 부르주아들이 다수의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 부르주아들을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그 때에만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포퍼도 마르크스가 ꡔ자본론ꡕ에서 보여준 명쾌한 자본주의 분석과 급진적 사회 개혁론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어느 날 시위 도중에 어느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꾼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개인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킬 수 있는 이념이라면 올바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포퍼의 사상은 항상 전체보다는 개인을, 청사진(靑寫眞)에 기댄 혁명보다는 다수의 동의에 기초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이는 절대적인 이념과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우는 전쟁과 혼란이 오히려 사람들을 부정의와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포퍼 스스로 젊은 시절에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증가능성-불완전해야 완전하다.”
극히 불안한 시대 상황과 생계 걱정 속에서도 포퍼는 학문적 경력을 계속 쌓여 갔다. 생계를 위해 목수(木手)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루고 빈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쇤베르크의 ‘개인음악 연주 협회’에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상류 사회에서의 관습과 하층민의 생계 걱정이 일상에서 교차하는 불안한 시기였던 것이다.
1925년, 스물세 살의 포퍼는 사범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그에게 이는 진학을 위한 전기가 되었다. 4년 뒤에는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 자격을 얻어 1930년에는 마침내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교단에 선 1930년의 세상은 온통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듯이 보였다. 미국의 증권시장이 붕괴되었고 독일의 실업자 수는 500만을 넘어섰다. 더욱더 강해지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포퍼의 목줄을 죄어 왔다. 과학 철학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고 평가 받는 ꡔ탐구의 논리ꡕ는 바로 이 시기에 쓰여 진 작품이다.


ꡔ탐구의 논리ꡕ가 완성될 무렵 빈의 거리는 벌써 나치 표장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치 완장을 두른 젊은이와 나눈 대화에서 포퍼는 큰 충격을 받는다.
“...나하고 논쟁하고 싶다구? 난 논쟁 따위는 하지 않아. 그 대신 총을 갈기지.”

포퍼의 철학은 자기 이념에 확신에 차서 반성할 줄 모르는 이 젊은이에 대한 반론 같은 느낌을 준다. 무엇이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다루는 ꡔ탐구의 논리ꡕ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포퍼에 의하면 이론은 ‘반증가능성(Falsiability)’이 있을 때에만 진정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자들은 혜성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한 가설을 제안할 수 있다. 점성술사도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문학을 ‘과학’이라 하지만 점성술은 ‘미신’이라 부른다. 둘 다 정교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고 (제대로 된 점성술자가 되기는 천문학 박사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별의 움직임을 상당수준까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게다가 ‘별 점’은 맞는 경우도 꽤 많다. 반대로, 육안으로 직접 별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천문학의 예측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왜 천문학은 과학이고 점성술은 미신에 불과할까?


포퍼의 ‘반증가능성’은 이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미신, 혹은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은 예측이 틀릴 경우나 맞는 경우나 객관적인 토론과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혜성의 궤도가 예측과 어긋났을 경우, 태양 인력의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계산 결과라는 과학자들의 반론에는 다른 증거를 들이대며 재반론을 펴는 등 객관적인 토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곰 자리가 처녀자리 보다 강해져서 그렇게 됐다는 점성술가의 설명에 대해서는 토론을 붙여봐야 납득할 만한 결론을 얻기 힘들다.


이처럼 사이비 이론들은 반증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적 일 수 없다.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틀릴 수 있고 (반증 가능하고),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성장 발전하며 좀더 올바른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부단한 토론과 이성적인 반증하는 가운데서 과학은 성립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1934년 첫 출간된 ꡔ탐구의 논리ꡕ는 식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1959년 이 책이 ꡔ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ꡕ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때의 폭발적인 인기에 비하면 ‘세 발의 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유태계 사람들에게는 대학으로 진출하여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게다가 나치의 탄압은 점점 더 노골적이어서 독일로 합병된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37년, 35세의 포퍼는 당시에는 ‘달나라 다음으로 먼 곳’이었던 뉴질랜드 크리스트 처치의 켄터베리 대학의 교수직을 얻어서 떠난다.


그에게 교수직 추천장을 써 준 이들은 아인슈타인, 러셀, 무어, 카르납 등 당대 최고 스타급 학자들이다. 연구물이라곤 저서 한 권 정도였던 젊은 고등학교 선생에게 거물급 학자들이 선뜻 추천서를 써주었던 것을 보면 젊은 포퍼의 잠재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포퍼는 이 곳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1945년 종전될 때까지 지낸다. 그러나 미처 탈출하지 못해 오스트리아에 남은 친지들은 대부분 온전치 못했다. 외가 쪽 친척 16명이 홀로코스트 때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달나라만큼 먼 곳’에 있는 그가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비참한 현실에 대항하여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ꡔ열린사회와 그 적들ꡕ과 ꡔ역사주의의 빈곤ꡕ은 이런 노력의 결과이다.


‘열린사회’는 ‘닫힌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닫힌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닫힌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에 기초해 있다.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역사에 있어 올바른 방향을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빠져있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보다는 힘에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열린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할 있는 약속과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경험 부족 때문에 많은 혼란과 실수가 일어나지만 토론을 통한 길고 지루한 세세한 조정들을 거쳐 오류는 점차 제거되며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고 믿는다.
열린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인류는 발전할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로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고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열린사회는 닫힌사회와 같이 이상과 계획에 따라 개인들을 강제하고 희생시키면서 사회전체를 개선하려고 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대해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 거창한 이론들이 자신들의 장밋빛 이상에 심취 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놓고 있던 시대에 포퍼의 열린사회 주장은 분명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는 합리적인 이론이었다.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
1946년, 전쟁이 끝나자 포퍼는 영국 시민권을 얻고 런던 경제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유럽으로 돌아온다. 1969년 퇴임할 때까지 계속 이 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ꡔ탐구의 논리ꡕ와 ꡔ열린사회와 그 적들ꡕ의 저자로 포퍼는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존경받았다.
종전 후 다시 소련,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라는 ‘닫힌사회’가 등장하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맞서게 되자 이번에는 ꡔ열린사회와 그 적들ꡕ이 그들에 대한 비판서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명성을 얻었다. 이 왜소한 체구에 오스트리아 출신 망명자는 63세에는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포퍼 경(卿)으로 불린다.) 많은 국가원수들이 영국을 방문할 때면 그에게 찾아가려고 했고 방문자 명단엔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있었다. 일본천황도 그를 초대했던 적이 있다.


90세가 넘는 생애와 ‘열린...’의 어감 때문에 포퍼라고 하면 부드럽고 자상한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는 자기주장에 대한 반대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무척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ꡔ열린사회와 그 적들ꡕ은 ‘열린사회의 적’에 의해 쓰여 졌다고 비꼴 정도였다. 그는 ‘논쟁을 위한 싸움 닭’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선뜻 질문을 잘못했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기 일 수였고 상대가 상당한 석학일 경우에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그와 논쟁을 벌이던 중에 부지깽이를 휘두를 정도로 흥분했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비트겐슈타인도 ‘한 성격’하는 사람이었지만 포퍼도 못지않았으니 결과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듯도 싶다.


그러나 포퍼의 과격함은 학문의 장에서만 그랬다. 일상에서 포퍼는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그가 학생들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학생들도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연구를 위해 외딴 곳에 집을 얻어 아내와 은둔하며 지냈지만 말년의 포퍼의 모습은 양녀의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손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등 여느 행복한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포퍼 철학의 영예로운 은퇴”
1994년, 포퍼의 죽음이 보도되었을 때, ‘아직도 포퍼가 살아있었어?’라고 의아해 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필자도 그중에 한명이다.) 그도 그럴 것이 ꡔ열린사회와 그 적들ꡕ과 ꡔ탐구의 논리ꡕ는 이미 1950년대부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었기 때문이다.
포퍼는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포퍼의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열린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적이었던 전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생전에 이미 몰락했다. ‘반증가능성’과 ‘점진적 사회 공학’의 이념은 이제 우리에게는 상식에 속한다.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쇠퇴한다기보다 임무를 다해 영예롭게 은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그러나 포퍼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열린사회 주장은 현실에 존재하는 닫힌사회들에 오히려 도움만 주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 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약자들이 강자의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자기주장을 합리적으로 내세워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 한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포퍼가 자본가들의 옹호자로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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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이 작성한 이 글은 고교 독서평설(지학사) 2003년 3월호에 개제되었던 것입니다. 상업적 목적의 이용은 지학사와 상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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